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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c 에픽: 다섯개의 판


북촌에 위치한  갤러리  컴바인웍스는   이승연 개인전  ‘ Epic 다섯개의 판 ’ 을 2025년 07월10일부터  08월 02일까지 진행한다

이승연 작가의 개인전 《에픽: 다섯 개의 판》이 오는 7월 10 일부터 20 일까지 금호미술관,  그리고 7월 10일부터 8월 2일까지 북촌의  컴바인웍스 갤러리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다시 말, 이야기, 시


영웅의 장대한 모험을 구술한 서사시를 에픽(epic)[1]이라 한다.  에픽은 신화적 인물이 겪는 갖은 고초와 영광을 수사적 으로 표현한 장르로, 약 3000년 전에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대표적인 예시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그리스 시대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에픽은 어슐러 K. 르 귄이 <소설판 장바구니론>[2]에서 설명하는 사냥꾼의 이야기와도 연결된다.1986년에 발표한 짧지만 강렬한 이 에세이에서 르 귄은 주 식량으로 채소와 곡물을 섭취하던 호미니드[3]의 일부가 매머드 사냥에 나섰다가 고기와 함께 들고 온 영웅담의 등장에 대해 말한다. 사냥을 하지 않은 이들이 보내는 평범한 일과, 그러니까 ‘힘들게 야생 귀리 낱알을 까고, 또 까고, 또 까고, 또 까느라 고생을’ 한 이야기가 ‘화살이 매머드의 눈을 뚫고 뇌에 박혀’ 쓰러지며 동료 사냥꾼을 젤리처럼 으깨 놓았다는 이야기와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4]  그동안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창과 칼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저자는 사냥꾼의 이야기에 동원된 수많은 이들 위에는 오로지 무기를 든 영웅만이 남는다고 지적하며 그런 옛 이야기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귀리나 나무 열매처럼 자루나 주머니 속에 들어갈만한 더없이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무한 해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우리는 말, 이야기, 시 등을 접할 때 종종 시각화를 하곤 한다. 특정한 형상과 구조, 분위기가 그려지는데 그것은 상상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가지는 고유한 활동이자 경험이다. 말이나 글을 접하는 이 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이야기와 자신의 관계성에 감응할수록 그 세계는 선명하고 구체적인 모습을 갖출 것이다. 예컨대 히에로니무스 보쉬가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을 그릴 때 그는 종교적 교리를 시각화 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그는 화면의 등장물 을 구성할 때 신대륙에서 들려오는 소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마도 이러한 창작의 토대 안에서 상상력을 증폭시켜 그 혼돈적이면서도 면밀한 구성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른바 보쉬 스타일을 영구적으로 심어 뒀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동방에서 들여온 동식물의 도판, 그 중에서도 여행서적에서 찾은 기린과 사자의 이미지를 참조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말씀이 그림이 된 삼면화를 통해 교훈을 얻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세계에 서식하는 온갖 종류의 동식물과 자연물의 묘사, 혹은 초현실적인 존재에 빠져든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현세에 대한 성찰이나 계절감, 색채, 명암에 몰입할 수도 있다. 이렇듯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단일한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종의 이야기를 담은 저장소가 될 수 있다.


 이승연의 작업에도 르 귄이 말한 보따리같은 요소가 있다. 예술가이자 여행가로서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작가는 여행을 다녀오면 관찰자의 시선으로 항상 벅찰 만큼 많은 이야기를 들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들은 주로 생명과 다양성에 관한 다정한 시선을 신화적 요소와 결합한 작업으로 귀결되곤 한다. 본능적으로 이야기의 힘을 믿는 몽상가는 여행지의 설화와 자신의 경험을 결합한 시각적 스토리텔링의 방법론을 일찌감치 찾았다. 대부분 작업의 토대가 되는 것은 드로잉이지만 항상 종이나 캔버스가 작업의 지지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작가의 원안은 손으로 제작한 터프팅 카펫이 되거나 대형 필름출력으로 라이트 박스 형태, 혹은 레이저로 커팅한 철제나 아크릴 조각이 되곤 했다. 타 장르의 예술가와 협업한 퍼포먼스, 텍스트를 동반한 아트 북이나 드로잉과 사물을 엮은 설치 형태를 선보이기도 했다. 맥락에 맞는 재료를 직관적으로 선택하고 그 물성, 혹은 행위가 담지한 문화적, 환경적 속성까지 작업에 포섭해 넓은 창작 범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을 이어 가다 보면 그가 가진 소재의 바구니가 얼마나 풍요로운지 문득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이번 개인전에서 판화 라는 오래된 매체를 선택한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섯 개의 판’ 이라는 전시의 부제는 작가가 주목한 각기 다른 대상을 뜻하는 동시에 판화를 지칭한다. 왜 판화일까?

고대에는 동일한 문양이나 문자를 복제하기 위해 쓰였고 이후 이야기나 믿음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던 이 매체는 종이 생산이 확대된 르네상스 초기가 되어서야 예술장르로서 발전하게 된다. 동양과 서양에서 각각 목판화와 동판화를 발전시켰고 이후 에칭, 리놀륨 판화, 실크스크린, 리소그래프 등이 개발됐다. 이중 작가가 선택한 기법은 리놀륨 판화와  아크릴 드라이포인트다. 이 둘의 공통점은 예리하게 파낸 부분에 잉크를 채운 뒤 프레스의 강한 압력으로 화지에 잉크를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왜 판화를 선택했냐는 물음에 작가는 조각하듯이 표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근래에 여행한 아메리카 대륙의 숲에서 받은 인상이 크게 작용했다. 작가는 뿌리가 산처럼 올라와 굽이치는 아르헨티나의 숲, 수많은 개체가 하나의 거대한 존재로 느껴진 브라질 상파울로 의 숲에 경탄했다. 그리고 2000년에 가까운 수령을 살아낸 멕시코 와하카의 툴레 나무는 그야말로 거대한 숲이었다고 증언한다.[5] 그 대자연을 다시금 새기고 깎아내면서 그 안에서 작가의 내면이 찾아낸 존재들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개월을 판화에 전념한 결과, 대지에 뿌리내린 다양한 식생과 균사체, 그 생태를 함께 누리는 생명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밀도 있게 표현된 다섯 개의 연작으로 준비됐다.


호기롭게 더없이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에픽의 전환을 적어 내려갔지만 일리아드나 오디세이보다 더 오래된 세계의 나무와 숲에 대해 그려 볼 때면 그저 아득 해지기만 한다. 에픽 이라는 장르가 고착되기도 전부터 존재한, 그 어떤 이야기보다  더 지난한 생명력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숲. 미지로 가득 찬 그곳에서는 영웅조차 길을 잃고 시험에 들거나 비로소 자신을 찾게 되는 성찰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승연은 이러한 유구한 시간과 물리적인 형상을 이야기꾼다운 선별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압축한다. 다만 그가 일일이 새겨 시각적으로 기술한 숲과 자연의 구성물들은 결말로 달려가는 이야기가 아닌, 전제는 주어지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재료들이 수없이 엮인 선(線)상의 파인 홈에 고여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관객은 온갖 기울기와 각도로 얽힌 거대한 뿌리, 신화적 생물과 실존하는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구성, 그러고 그들의 특질이 환기하는 상징성을 조합해 이야기를 변주해낼 수 있다. 복제라는 판화의 속성을 활용해 중복을 의도적으로 전시하는 것 또한 반복되고 순환되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 삶의 고리에 대한 은유로서 제시된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시작으로 돌아가볼까.

판이 차례로 프레스를 통과한다. 번트 엄버, 울트라 마린, 올리브 그린같이 자연에서 빌려온 안료가 물을 머금은  촉촉한 화지에 밀려 들어간다. 거대한 존재들을 포함해 작고 작은 균사체나 버섯 한 톨, 뿌리 한 가닥을 비롯한 여러 존재가 동일하게 선명하다. 대상에 대한 동등한 서술 앞에  에픽이라는 오랜 서사를 더없이 사소한 것이나 순환하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로 전용(轉用)해보려는 시도가 시작된다. 기획. 글 :김수정


 [1] 에픽의 어원 epos는 말, 이야기, 시를 뜻하며 이야기된 말, 서사가 있는 시로 해석할 수 있다. [2] 어슐러 K. 르 귄, 『세상 끝에서 춤추다』, 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2021(에세이 원제: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3] 현대 인류를 포함한 사람과의 영장류, 르 귄, 앞의 책, 292쪽)[4] 르 귄, 앞의 책, 293  [5] 작가노트 참고


                                                                                              

이승연 작가의 개인전 《에픽: 다섯 개의 판》이 오는 7월 10 일부터 20 일까지 금호미술관,  그리고 7월 10일부터 8월 2일까지 북촌의  컴바인웍스 갤러리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 ARTISTS ]


  • 이승연 Seungyoun, Lee (1982 ~ )


    학력

    2013 Central Saint Martins College of Art (센트럴 세인트 마틴) Narrative Environment 석사 졸업, 런던, 영국

     2013-2017아티스트 듀오

    이승연(한국), 알렉산더 어거스투스(영국)인으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 ‘더 바이트백 무브먼트’로도 활동

     

    개인전

    2023 ‘이방인의 해와 달’, 컴바인 웍스 아트 스페이스, 서울

    2021 ‘재난의 시대, 몽상 판타지아’, 광주 미디어 338 미디어 아트 플랫폼, 광주문화재단, 광주

    2020년 ‘유리병 바다, 가오슝’ , 가오슝 피어 투 피어 아트센터,(Pier-2 -Pier Art Center) 가오슝, 대만

    2020 ‘신세계환상곡’ , 수림아트센터, 서울 ,한국

    2018 ‘선의 환상’, 서울시립미술관 분관 세마 창고, 서울, 한국

    2018 ‘안녕 창백한 푸른 점’, 수유너머 104 소네마리 갤러리, 서울

    2015 ‘OH MY GODS: 2100년 무당, 천사 그리고 스토리 텔러’, 성북동 오래된 집, 캔 파운데이션, 서울

    2014 ‘OH MY GODS:2100년 당신의 믿음’ 문화역 284, 서울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로 참여)

    2014 ‘OH MY GODS:2100년 당신의 믿음’ 영은 미술관, 서울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로 참여)

    2013 ‘A Dangerous Figure’ 섬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 런던, (‘더 바이트 백 무브먼트’로 참여)

     

    주요 단체전 (Selected)

    2025 ‘우리를 바꾸는 다섯가지 대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2024 자신을 섬으로 하여, 봉은사, 서울

    2024 ‘다섯 발자국 숲’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 미술관,과천

    2024 ‘송신’ 수림큐브, 서울

    2024 WWW .Mindmapping 컴바인웍스 갤러리, 서울

    2023 ‘요괴백과도’ 이천 시립 월전 미술관, 이천

    2023 ‘구름 속 바다’ 파리 도향리 갤러리, 파리, 프랑스

    2023 ‘물결에서 함께 턴’, 포항 귀비도, 포항문화재단, 포항

    2023 ‘아티언스’, 대전예술가의 집, 대전, 한국

    2023 ‘구름 속 바다’, 도향리 갤러리, 파리, 프랑스

    2022 ‘생생화화: 사이의 언어’ 김홍도 미술관, 안산, 한국

    2022 수림문화재단 수림큐브 개관전 ‘수림 소장품전 Page one’,수림 큐브, 서울

    2021 서울대공원 야외 큐레이팅 전시 ‘모두의 동물원:야생동물과 반려동물 사이’, 서울대공원. 과천, 한국

    2021 창원국제조각비엔날레 프리뷰 전, ‘채널: 입자가 파동이 되는 순간’  성산 아트홀, 창원, 한국

    2021 ‘팔팔한 도시 여행’, 고양 아람누리 미술관, 고양, 한국

    2021 ‘현대미술의 시선 전’, 양평군립 미술관, 양평, 한국

    2020 ‘수상하고 이상한 기당 원더랜드’, 기당 미술관, 제주, 한국

    2020 서울평화문화축제, ‘도봉산 명랑운동회’ 평화문화진지, 서울

    2019 ‘산려소요’ 세종문화회관 야외 큐레이팅, 서울

    2019 서울로 미디어 캔버스 ‘네이처’ , 만리동 우리은행 건물, 서울

    2018 울산 태화강 국제 설치 미술제 ‘잠시 신이었던 것들’ 울산, 한국

    2018 SeMa예술가 길드 ‘만랩’  남서울 미술관, 서울, 대한민국

    2017 SeMa 예술가 길드 ‘표본 창고’ 서울시립미술관 세마 창고, 서울,

    2016  ‘La Nuit De L’Instant’, Les Ateliers de l'Image, Centre Photographique de Marseille, 프랑스                    

    2016  ‘예술가가 노동을 대하는 자세’ 인천아트플랫폼 협업 프로젝트. 인천아트플랫폼 B1갤러리,

    ‘비일상의 발견’, 전주 팔복예술공장 아카이빙 프로젝트, 전주

    2015‘플라스틱 신화’ 국립 광주 아시아 문화 전당 개관전, 광주 

    2015OH MY GOD: 2100 년 샤먼 그리고 도깨비 바람’.(현대무용가와 협업),

     문화역 서울 284 , 한국      

    2014 ‘A Hidden Face’, 한국에 온 이주민 사절단, 안산 아시아 예술축전,

     리트머스, 안산

    2014 ‘TRANSMUTE’ 브라이튼 디지털 아트 페스티벌, 브라이튼, 영국

    2013 ‘Dr Gentle and Mr Man’ Hoxton Arch  런던, 영국

    2012. ‘Musical Torch’, King’s Place, 런던, 영국

     

    공공미술 프로젝트

    2021서울대공원 야외 큐레이팅

    2021 Jump into the Sky, 광주문화재단 빛고을 시민회관 옥상, 광주

    2020 서울평화문화축제, 평화문화진지(11미터 가량의 ‘도봉산 명랑운동회’

    (그래피티 벽화 설치)

    2019 세종문화회관 야외 큐레이팅

    2018 필동 예술동 축제 ‘뱀신’설치

    2017 ‘떠나간 새와 남은 새’ 베를린 ZK/U 건물 지붕, 베를린, 독일

    2016 ‘어처구니: 다시 태어난 11신’ 인천아트플랫폼 지붕

     

    수상 및 기금

    2025 서울문화재단 예술활동창작지원 선정

    2025 ‘황금 곰팡이’볼로냐 라가치상 어메이징 북셀프 지속가능성부문 선정

    2025 아트경기 선정 작가

    2024 문화예술위원회 해외레지던시 기금

    2022  경기문화재단 생생화화 예술창작지원 기금

    2021 문화예술위원회 국제교류기금

    2021 경기문화재단 아트 경기 선정 작가

    2020 수림문화재단 시각예술지원 수림아트 랩 선정

    2019 한국출판산업진흥회 ‘루시와 다이아몬드’ 우수출판콘텐츠 선정

    2018 서울시립미술관 공간 지원 사업 전시 지원 선정

    201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 레지던시 기금

    201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교류 기금 

    201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해외 레지던시 기금


    레지던시

    2024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이스피랄 레지던시 2023 파리 이응노 레지던시

    2020 대만 가오슝 피어 투 피어 아트센터

    2019 루마니아 브라쇼브 현대미술 레지던시

    2018 독일 쉐핑헨 쿤스트 돌프 레지던시

    2017 독일 베를린 zk/u 레지던시

    2016 인천 아트플랫폼 레지던시 

    2016 금천 예술공장 레지던시

    2015 테미 예술창작센터

     

    출판

    2024 다섯 발자국 숲,  황금 곰팡이 그림책 단행본 출간, 국립현대미술관 제작지원 (전시 주제 함의한 최초 창작 그림책)

    2025 볼로냐 라가치상 에메이징 북 셀프 지속 가능성 부문 수상

    2019 루시와 다이아몬드 사이언스 픽션 그림책 출간, 나는책 출판사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

     

    소장

    수림문화재단,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광주아시아문화전당(ACC),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영은미술관, 인천아트플랫폼, 캔 파운데이션,

    서울대공원, 루마니아 브라쇼브 레두타 센터 (Braşov Reduta Cente),

    독일 쉐핑헨 타운홀(Schöppingen Town Hall), 베를린ZK/U, 외 개인소장



새기고,자라고,기울고,쌓이고,흐른다                 [ 작가 노트 ]


처음엔 나무만 보였다.하지만 걸음을 멈출수록, 숲은 나무 너머의 생명을 보여주었다. 핀란드의 적막한 숲을 걸었고, 멕시코 와하카 에서는 수령 2,000년 된 하나의 나무 이자 거대한 숲과 마주했다.아르헨티나에선 뿌리가 산처럼 솟은 나무들 사이를 걷고 또 걸었고, 과테말라에서는 수증기가 피어 오르는 검은 흙 위를 밟으며 산길을 올랐다.브라질 상파울루에선 비처럼 쏟아지는 나뭇잎들에 둘러싸였다.그제야 숲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숨 쉬고 기억하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다가왔다.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이야기들은 이미 그 숲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지난해 『다섯 발자국 숲, 황금 곰팡이』(국립현대미술관 제작지원, 아트북프레스 제작)를 만들며 숲과 버섯의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숲을 순환하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버섯은 죽음을 딛고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며, 마치 숨어 지내던 작고 신비한 신처럼 느껴졌다. 그 작은 존재를 바라보는 일은 어쩐지 애틋하고, 뭉클했다. 이번 전시는 내가 만난 그 숲의 이야기들을 담고자 했다. 내가 그린 숲은 단지 나무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숨겨진 뿌리, 기울어진 삶, 흔들리는 선, 그리고 바다 끝의 수평선까지— 자라나고, 되풀이되며,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에픽을 그리려 노력했다.


  • 〈기울어진 뿌리〉

완벽한 수직도, 수평도 아닌 생명의 기울기.기울어진 세계는 불완전한 방향으로 자라는 생명을 말한다.뿌리 아래에는 내가 만난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뿌리처럼 얽히고, 강물처럼 흐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속도로 살아간다. 관객은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게 되고, 앞으로 쏟아질 듯한 형태 속으로 시선과 몸이 끌려 들어간다. 작품을 ‘보는 것’을 넘어, 그 안에 숨 쉬는 생명들과 마주하게 된다.


  • <버섯력〉

생명의 순간들이 자라나는 숲의 지도.  각 버섯은 상상의 생명체이며, 균사처럼 퍼지는 연결 망 속에서 이 숲은 시간과 계절, 기억과 관계를 반복하며 성장한다. 16종의 상상 버섯은 갈색(퇴적)과 초록(발아), 두 시간의 결로 복제되었고, 퇴적의 기억과 발아의 환상이 번갈아 찍히며, 숲은 순환한다.


  • <숲의 마음은 아래로 자란다〉

숲의 마음은 위로 솟지 않고, 아래로 축적된다. 아래로 갈수록 작고 무거워지는 삼각뿔은 침전된 기억, 응축된 감정, 퇴적된 생명을 품고 있다. 가장 꼭대기에는 하나의 빈 삼각뿔이 남아 있다. 삼각뿔의 재료는 위에서 아래로 변한다. 생명의 감각을 담은 자작나무에서 시작해, 시간의 침잠을 상징하는 부식된 철로 바뀌며 아래로 내려간다. 시간은 이  구조 안에서 선형으로 흐르지 않는다. 감정은 아래로 가라앉고, 기억은 수직으로 퇴적된다. 숲의 마음은 아래로 향하며 작고 단단해진다.


  • <수평면〉

숲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푸른 바다와 하늘이 뒤집히고, 수평선은 선이 아니라 면처럼 쌓인다. 이 숲은 바다 너머로 자라난다.누군가 에겐 끝이지만, 또 누군가 에겐 시작이 된다.


  • 〈균사의 숲〉

니들로 긁어낸 선 위로 빛과 그림자가 흐른다. 그 선들은 뿌리이자 균사이며, 판 위에서 다시 태어난 생명의 흔적이다. 빛은 선을 따라 흐르고, 그림자는 다시 숲이 된다.


이 다섯 개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보이지 않던 숲의 생명이 자라는 방식을 상상했다. 자라나고, 기울고, 반복되고, 바다를 건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자라고 있는 작고 거대한 생명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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